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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츠카 치카시

藤塚鄰
1879~1948

한학자. 문학박사. 호는 소헌(素軒), 당호는 망한려(望漢廬). 도쿄대학 중국철학과를 졸업하고 제8고등학교 교수. 경성제국대학 교수, 대동문화학원(大東文化學院) 대학장을 역임했다. 호시노 호오죠오(星野豊城)에게 배워 청조(淸朝) 경학(經學)을 접했으며, 고거학(考據學)을 바탕으로 경의(經義)의 재평가에 전념했다. 청나라 학자의 경해(經解) 원간본을 수집한 것이 만여 권에 이르고, 한묵수찰(翰墨手札)의 종류도 많았다. 경성제국대학 재직 중 조선의 김정희와 완원(阮元)ㆍ옹방강(翁方綱) 등과의 학연을 추적하는 등 청조 경학이 동전(東傳)한 양상, 경학을 중심으로 한 중국ㆍ조선ㆍ일본의 문화 교류의 전모를 밝혀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에 『일(日)ㆍ선(鮮)ㆍ청(淸)의 문화교류』,
『논어총설』, 『청조 문화 동전(東傳)의 연구』 등이 있다.

후지츠카 아키나오
藤塚明直
1912~2006

부친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할 때 한국에 와서 5년간 생활하며 경성공립중학교를 마쳤다. 도쿄대학교 중국철학과를 졸업했다. 부친의 영향으로 「『황청경해』의 편찬과 그 영향에 관한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썼다. 도쿄부립 제9중학교 교유(敎諭)로, 군마(群馬)대학 교양학부에서 한문 강사로 각각 재직했다. 퇴직 후 넉넉지 않는 생활이면서도 부친의 자료가 조선의 고도의 정신이 담긴 문화재라는 긍지와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도 팔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관해온 추사관련 자료들을 2006년 과천시에 기증했다.
저서

1947, 『日鮮淸의 文化交流』 中文館書店
1949, 『論語總說』 弘文堂
1949, 『論語의 味讀』 斯文會
1975, 『淸朝文化東傳의 硏究』 藤塚明直 編, 國書刊行會

논문

1913, 「中庸에 對한 疑問설을 論함」1,2,3 東亞硏究3권
1919 1920, 「詹詹錄」 斯文제1편6호, 제2편1,3호
1926, 「四庫全書編纂과 其 環境」 文敎의 朝鮮
1929, 「李朝의 學人과 乾隆文化」 朝鮮支那文化의 硏究
1929, 「高麗版龍龕手鏡解說」 朝鮮支那文化의 硏究
1931, 「朱子와 論語」 文敎의 朝鮮
1931, 「慶尙南道海印寺藏板高麗版「一切經音義」의 印刷製本實現과 解說」
1931, 「五敎敎義發展의 史的考察-禮와 中庸」 警務彙報321호
1935, 「物徂徠의 論語徵과 淸朝의 經師」 支那學硏究제4편
1935, 「金秋史의 入燕과 翁·阮二經師」 東方文化史叢考
1935, 「阮堂集 및 阮堂全集의 檢討」 靑丘學叢21호
1935, 「汪孟慈의 所謂海外墨緣의 草本과 金阮堂」 漢學會雜誌3권2호
1936, 「金阮堂과 阮芸臺父子」 服部先生古稀祝賀論文集
1936, 「汪孟慈와 金阮堂」 漢學會雜誌4권2호
1936, 「翁覃溪의 硏究指導와 金秋史」 京城帝國大學創立十周年記念論文集哲學篇
1938, 「淸朝文化東漸史上에 있어서 李日汀과 金阮堂」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論文集
1937, 「論語의 編纂 및 體例에 關하여 二, 三의 考察」 速見博士還曆記念心理學哲學論文集
1937, 「中庸秦漢儒作의 檢討」 漢學會雜誌2권
1937, 「金阮堂과 吳蘭雪의 翰墨緣」 稻葉博士還曆記念論文集
1938, 「阮堂集 및 阮堂先生全集에서 誤入된 淸儒의 名文」 朝鮮276
1938, 「阮堂集誤入文의 再檢討와 淸儒阮元 및 梁章鉅의 展望」 朝鮮279
1939, 「敎學과 道德」 文敎의 朝鮮169
1939, 「淸·鮮文化交流의 一瀾」 書ㆍ3권5,6 6호
1939, 「何晏의 論語集解에 關한 二, 三의 考察」 漢學會雜誌7권3호
1940, 「古事熟語大辭典의 誤謬를 살핀다」 文敎의 朝鮮175

김채식(성균관대박물관학예사)


이 글은 필자가 일본 동경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에 1년간 유학하던 중, 과천문화원이 자료를 기증받는 과정에 통역으로 참여하면서 아키나오(藤塚明直) 선생과 인터뷰도 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재구성한 것임.
藤塚鄰(1879~1948)의 본성은 사사끼(佐々木), 부친은 篤太郞, 모친은 なほ子이다. 본적은 宮城縣 塩竈市 宇山寺 131이고, 서울에 살던 주소는 忠信洞 27번지, 만년의 주소는 東京都 練馬區 南町 2-3656이었다. 호는 素軒, 당호를 望漢廬이라 하였는데 북한산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후지츠카는 1892년(14세)부터 宮城縣 宮城郡 塩竈町 宇山寺의 藤塚氏에게 가서 거처하다가 1897(19세)년 9월에 정식으로 入籍하여 그 집안의 후사가 되었다. 藤塚氏는 대대로 奧州 塩釜神社의 神官인데, 守氏足利시기(17세기 이전)에는 森, 江戶초기(17세기 이후)에 藤塚으로 성을 바꾸었다. 에도시기에 知直이 가문을 다시 일으켜 그의 아들 知明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知明의 자는 子章, 통칭은 式部, 호는 塩亭이다. 神典과 圖書에 정통하여 넓고 정밀한 식견이 널리 알려졌다. 또 외국에도 관심을 두어 서양의 문물을 적극 수입하여 동서문화의 융합을 도모하였다. 『海國兵談』의 저자 林子平(1738~1793))을 비롯한 천하의 명사들과 교유하였고, 10만권 장서의 名山文庫를 창립하여 文敎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후지츠카가 이름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며 존숭한 두 분의 스승이 있다. 바로 호시노 호오죠오(星野豊城, 1858~1936)와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1867~1939)이다.
호시노는 이름이 恒, 豊城는 호이다. 79세로 작고하기 전까지 동경대 문과대학 교수였고, 후지츠카는 명치40년을 전후로 동경대학에 재학 중에 그의 학은을 입었다. 호시노는 시오노야 토오인(塩谷宕陰, 이름은 世弘, 1809~1867)의 고족제자이다. 시오노야는 야스이 쇼켄(安井息軒, 1799~1876)과 함께 마쓰자키 고오도오(松崎慊堂, 1771~1844)의 학통을 이었다(松崎慊堂 → 塩谷宕陰 → 星野豊城 → 藤塚鄰). 마쓰자키는 『慊堂日曆』의 저자로 1811년 조선통신사 일행을 대마도에서 맞아 金履喬․金善臣․李顯相 등과 많은 문답을 주고받는 등 조선의 학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후지츠카는 황청경해의 연구와 이용에 대하여 호시노선생께 충분히 배워 청조고증학․경서의 문헌학적 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핫토리는 중국철학 전공으로 동경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이다. 후지츠카에게 현대적인 학문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게다가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창립되어 총장이 되면서 후지츠카에게 경성제대의 교수직을 마련해 준 인물이다. 후지츠카가 한국에서 15년간 연구하게 된 것은 핫토리의 은혜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동양사상 전공의 시오노야 온(塩谷溫, 1878~1962, 호는 節山. 塩谷宕陰의 손자)과 중국철학 전공의 우노 테츠토(宇野哲人, 1875-1974)도 깊은 학은을 입은 스승들이다.
후지츠카의 학문은 가토오 죠오겐(加藤常賢)과 우노 세이치(宇野精一)에게 이어졌다. 가토오는 제8고등학교 시절의 수제자로 후지츠카의 권유로 중국철학을 시작하여 히로시마대학과 동경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 경성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어 지나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1928.3.31~1933.12.27) 후지츠카의 사후에 저서를 도맡아 간행해 주었다. 우노는 宇野哲人의 아들로, 후지츠카가 경성제대를 정년퇴임하고 동경에 돌아왔을 때 동방문화학원에서 만나 사사받았다. 동경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후지츠카는 제8고등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21(43세)년에 문부성으로부터 經學 연구를 위해 중국유학을 허가 받아 북경으로 떠났다. 10월에 출발하여 다음해 5월 7일까지 약 1년 반 동안 체류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琉璃廠, 隆福寺 거리의 서점가를 수백 차례 드나들며 한적을 많이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문인 陳鱣이 조선의 박제가의 문집에 쓴 서문 「貞蕤藁略敍」를 발견하여 호기심이 일었는데, 이것이 후지츠카가 평생을 청나라와 조선의 문화교류에 대해 연구하게 된 시발점이다. 중국에서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핫토리 선생이 경성제국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함께 가자고 권하여 숙고 끝에 허락하였다. 이후 박제가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진척되면서 박제가가 단지 일개 문인이 아니라 청조의 학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은 박학다재의 인재임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박제가의 스승이 박지원이고, 제자가 바로 김정희임을 알게 되자, 평소 조선이 宋․明의 그늘 아래서 독창적인 면모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무참히 깨져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후지츠카의 본래 전공은 논어였다. 漢學(고증학)의 입장에서 논어를 재해석해 보려고 하였다. 현재 남은 한적자료를 보면 중국에서 간행된 논어주석은 물론 일본에서 출판된 논어주석까지 망라하여 종류와 수량이 가장 많다.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에도 논어로 쓸것인가 갈등하였으나, 스승인 宇野哲人이 淸朝와 朝鮮의 학문 교류 양상을 정리해 내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권하였다. 결국 청조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양상을 고증학자의 입장에서 논증한 논문을 쓰게 되었고, 이후로도 이의 연구에 평생을 전력하였다.
1936(58세) 4월30일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논문제목은 「李朝에 있어서 淸朝文化의 移入과 金阮堂」이다. 논문심사는 중국철학 전공의 宇野哲人이 주심, 중국문학 전공의 塩谷溫과 동양사(한국사) 전공의 池內宏 두 교수가 담당하였다. 후에 이 논문은 아들 등총명직에 의해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國書刊行會, 1975)』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의 심사평에 따르면, “요컨대 본 논문은 청조학술에 조예가 깊은 저자가 오로지 조선의 금석학자로서만 알려진 김완당이 실은 청조학술의 정수에 정통한 경학의 대가임을 논정하여, 이조 오백년 문화사상 종래 알려지지 않았던 방면을 천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지츠카의 연구방향은 청조의 학문이 東傳(조선과 일본에 전래)의 양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학계나 모임에서 으레 한국학자로 불리는 것을 극력 거부하고, 오로지 청조경학에 기반한 고증학자로 평가되길 원하였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청조학문의 조선 유입 양상과 김정희와 청조학인들의 교유에 대해서는 후지츠카의 연구가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후지츠카의 연구성과는 자료와 고증의 측면에서 후인이 쉽게 뛰어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리고 그가 청조와 조선의 학술교류에 평생을 투신함으로써 조선의 학술을 착실히 밝혀내는 성과를 이뤘지만, 그로 인해 정작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거의 잊혀진 학자가 되고 말았다. 후지츠카라는 한 학자 개인으로서는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후지츠카는 평소 ‘書痴’로 알려져 박학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중국의 유리창, 한국의 인사동을 주유하며 수집한 자료가 워낙 방대하여, 학생들이 늘 찾아와 열람하며 도서관에도 없는 자료가 많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아들 藤塚明直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책장사가 당시 동대문 근처의 충신동 자택으로까지 책을 싸들고 수시로 찾아올 정도였고, 교수 월급을 제대로 가져오지 않아 가족들이 꽤나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본래부터 후지츠카 집안에는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으나 차차 소진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한묵자료들이 보존상태가 모두 최고급이고, 유리원판 및 사진 자료가 많은 것으로 보아 후지츠카가 자료에 얼마나 많은 금전과 노력을 들였는가는 짐작할 수 있다.
후지츠카가 일본에 귀국하여 대동문화학원에 취임하였을 때, 많은 서적들을 학원의 도서실에 갖다 놓았는데, 주로 중국책이었고 조선관련 서적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전쟁의 와중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고, 평소 자택에 두고 보던 한묵자료는 무사히 화를 면하였다. 후지츠카는 물론 가족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으나, 불에 탄 자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대신 구해준 것으로 위안하였다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 일본 전체가 점점 어려워졌고, 후지츠카 집안도 마찬가지여서 값나가는 자료부터 차례로 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중에 일부는 여러 경로를 돌고돌아 한국에 돌아온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정체와 행방이 묘연한 실정이다.
후지츠카는 경성제국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한국의 인사들과 많은 교유를 하였다. 爲堂 鄭寅普, 六堂 崔南善, 滄浪 張澤相, 多山 朴榮喆, 穎雲 金容鎭, 海旅 林尙鍾, 松隱 李秉直, 無號 李漢福, 素筌 孫在馨 등이 확인되는데, 한국의 내로라하는 감식안들과 교유하면서 서화나 한묵자료를 함께 감상하였고 직접 수집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서에 『日鮮淸의 文化交流』(中文館書店, 1947), 『論語總說』(弘文館, 1949), 『論語의 味讀』(斯文會, 1949),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國書刊行會, 197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