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추사의 재조명 > 후지츠카 기증자료
2005년
3월


4~9월

9. 22

9. 25

10. 8



10월

11월

12. 10



12. 12

12. 13~25

12. 26

12. 30
2006년 예정된 국제학술대회에 후지츠카 아키나오를 초청키로 하고, 추사 연구 논문「청조문화동전(淸朝文化東傳)의 연구」번역을 위한 판권 소유에 대해 동의를 받기로 함.

후지츠카 아키나오 연락처 조사.

요시다 교수로부터 연락처 이메일 접수하고 이튿날 답신 보냄.

후지츠카 아키나오와 통화하기 시작하고 편지 보냄.

첫 번째 서신 받음.(부친의 경성제국대학교 교수 시절 내용과 퇴임 후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1945년 5월 폭격으로 자료가 소실된 일 등을 언급.)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함. 「배용준이 아닌 박제가」라는 기고문 보내옴.

논문 발표에 관한 협의. 추사 관련 자료 보관 유무, 과천의 추사 관련 사업 내용 등 확인.

후지츠카 아키나오 자택 방문 계획 등 협의.

도쿄 네리마(.馬)에 있는 자택 방문. 주요 언급 내용은 다음과 같다.(학술대회에 논문 발표하겠다. / 일본에서의 추사 연구는 안 되고 있으며, 한국의 추사 연구를 돕고 싶다. / 건강이 허락하면 내년에 방한하겠다. / 연구 논문 번역과 그 밖의 글의 활용에 동의한다. / 부친의 추사 연구가 과천에서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추사 관련 자료를 기증할 의사를 보임.

전화로 자료 기증 관련 협의.

기증 자료 인수 절차를 협의하고 서신 보냄.

기증 자료 기증 방법에 대한 의견을 서신으로 받음. 기증 자료 목록 작성 및 인수 진행은 과천문화원에서 하기로 함. 연구 논문 번역에 대한 감사문, 후지츠카 치카시 박사의 사진 2매와 약력 등을 받음.
2006년
1. 13

1. 14

1. 15

1. 16



1. 17

1. 18

2. 2

2. 25


2. 26



2. 28

3. 6

3.7


5. 18

6. 23

7. 2

7. 4


7. 5

7. 23

8. 5

8. 6

8. 7

8. 14

8. 23

기증 자료 인수팀 출국하여 자택 방문하고 일정 협의.

기증 자료 목록 작성. KBS 제작본부 교육문화 팀이 현황 촬영.

기증 자료 목록 정리하고 탁송 협의.

기증 자료 포장. 과천시장과 후지츠카 아키나오, 기증 협약 체
결.(과천시장은 기증자의 뜻에 따라 자료실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연구하며, 전시 사업을 추진하기로 약속하고 추사 관련자료 2750점을 인수한다는 내용임.)

연구 논문 박사학위 심사 보고서 받음. 기증 자료 일본 세관 통관.

기증 자료 인천공항에 도착. 인수팀 귀국. 기증 소감과 향후 사업 희망에 관한 글 받음.

기증 자료 언론에 공개하고 기자회견. 주요 일간지와 TV 인터뷰.

후지츠카 아키나오 감사의 글을 보내옴.(이번 자료 기증은 높은 차원의 역사적인 사건이고, 한국인 여러분의 정중한 예의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는 내용임.)

후지츠카 아키나오 자택 방문. 과천문화원 고문으로 추대. 보도자료 등 증정, 일본 언론 보도 희망. 기증 자료 협의서 체결.(향후 관련 자료가 발견되면 추가로 기증하며, 양장본과 기타 자료 일체는 본인이 사망 후 기증토록 하겠다는 내용임.)

『황청경해(皇淸經解)』는 일본보다 조선에 먼저 전해졌다는 글을 받음.

서울에서 이정자씨 외 2명이 선생에게 감사 편지 보냄.

국제학술대회에 건강상 참석치 못한다는 서신 받음. 조선은 일본학문의 은인이라는 글 받음.
5월 서울에서 박은주 선생, 임재현, 백승하, 양우철 어린이가 선생에게 감사의 서신보냄.

주일 한국대사를 통하여 대한민국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함. 조카딸 코마다 여사가 대신 받아 전함.

후지츠카 아키나오 입원(中野江古病院 1218호실).

문병. 허장민 선생이 보낸 박제가의 초서 사본 증정.

병원에서 별세. "선생은 고통 없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자는 것처럼 운명하셨다."라고 코마다 여사가 전화로 알림.

화장.

가족묘지에 안장(東村山市 小平靈園).

과천시, 과천문화원, 추사연구회 대표 6명이 후지츠카 아키나오의 가족묘지에 참배하고 애도의 뜻을 전함.

2차 자료 인수.

2차 자료 5상자분 항공편 탁송, 113상자분 선박편 탁송.

항공편으로 보낸 자료 도착.

선박편으로 보낸 자료 인천항에 도착.

최종수(과천문화원장)


우리나라에서 중학교를 졸업했고 이순신 장군을 특별히 존경한다는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 선생은 “3세기에 왕인 박사가『논어』와『천자문』을 일본에 가져와 처음으로 학문의 길이 열렸으며, 이제 21세기에 이르러 과거에 부친이 모은 김완당(金阮堂)과 주변 학자들의 자료를 모두 과천에 기증하게 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한다.”라며 부친의 추사 연구가 계속 이어지고 자료가 영구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전해왔다.
그는 이들 자료를 일본의 대학교에 기증하면 도서관에서 먼지에 싸인 채 제대로 활용되지 않게 되고 조카(코마다 가즈코 駒田和子)에게 물려줘도 그녀가 완당에 대하여 알지 못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추사 연구를 꾸준히 추진해 왔으며 향후 계획이 뚜렷한 과천시에 기증하여 추사 연구가 더욱 활발해진다면 돌아가신 부친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므로 모든 자료를 기증한다고 했다.
선생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하는 날, 도쿄의 한국 대사관은 너무도 쓸쓸했다. 문화재청에서는 훈장 서훈을 위하여 선생을 초청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주일대사를 통해 훈장을 전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생이 주일대사관에 가서 전해 받기로 했는데, 건강이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5월초부터는 움직이기조차 힘들어졌고, 5월 12일부터는 계속 산소호흡기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며칠 뒤에는 앉아 있기도 어려워 누워서 지내야 했다.
부득이 조카딸 코마다 가즈코 여사를 한국 대사관에 안내하여 상승만 일등서기관 등 대사관 직원과 필자를 비롯한 한국의 대표단이 배석한 가운데 나종일 주(駐)일본국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가 훈장을 전하였고, 저녁때 네리마(練馬)에 있는 자택으로 가서 누워 계신 선생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 드렸다.
한편 선생은 금년 가을에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참석도 불가능해져 선생이 미리 써둔 논문을 읽는 모습으로 영상을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곤란하게 되어 논문 원고를 들고 있는 모습 한 장면만 촬영하기로 했는데, 몹시 힘들어 하면서도 원고를 끝까지 읽어 나가셨다. 원고를 낭독한 후 호흡 곤란 증세와 심한 기침으로 위험한 순간을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두를 안타깝게 하는 그 순간에도 선생은“영혼이 방안에서 주위를 맴돌며 점점 멀어져 가 아마 내일쯤 죽게 될 것 같다”고 하시면서 모든 책과 자료를 과천으로 보내라고 조카딸에게 다시 다짐해 두셨다.
이튿날 선생은 목소리는 다소 나아졌지만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때 선생이 말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작년 가을 최 원장과의 전화 통화 이후 자료 일체를 기증하면서 그동안 즐겁게 지냈다. /머리는 아직 건강한데 폐가 많이 나빠져 회복하기 힘들다. /한국의 대통령이 (내게)훈장을 수여하여 영광이다. /그간의 문화교류를 통해 추사에 대해 한국에서 더욱 열심히 연구하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청조(淸朝)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조선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밝혔다. /일본에는 유교가 없어졌는데 한국에는 유교가 살아 있는 것을 이번에 발견했다. /한국인들이 자주 찾아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것은 유교사상이 한국에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청나라 학자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책과 학문을 수입했는데 일본은 책을 탱커를 이용해 사왔다.
한편 그는 “그동안 자료를 처리하지 못하여 죽지 못했으며, 추사 관련 자료가 지금까지 나를 살게 했다.”고 했다. 참으로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으며, 빨리 죽어서 편해지고 싶다고까지 했다. 완당 연구를 계속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같은 날 코마다 여사는 주일대사로부터 자료를 기증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녀는 선생이 돌아가시면 혼자서 뒷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때 연락을 하겠으며, 선생의 유언대로 남은 자료는 과천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좋은 일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선생의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 속에 귀국길에 올랐다.

김영복(문우서림 대표)


후지츠카 치카시(이하 ‘후지츠카’라 하고, 그의 아들은 ‘후지츠카 아키나오’라 함) 소장 추사 유물 기증 자료는 추사 연구의 선구자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가 평생 수집한 추사 관련 자료와 그 집안에 소장돼온 일본 한학 관련 자료 일체이다.
기증된 자료는 26점의 추사 친필을 비롯하여, 추사와 청대 학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우선 이상적, 추사의 아우로서 청대 학계와 교류가 깊었던 산천 김명희 그리고 초정 박제가와 영재 유득공 등에게 보낸 청대 학자들의 많은 글과 그림 등 서화류가 70여 점에 이른다. 또한 청대 학술, 특히 경학에 관한 주요 자료인『황청경해』680책이 포함된 선장본이 약 2500책, 근대 양장본이 약 1500책에 이르며, 후지츠카가 정리한 원고 자료와 실물 사진 등이 1000여 종에 이른다. 또한 후지츠카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고문서와 서적 등이 200여 점에 이르고,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가 수집.소장한 프랑스 중심의 영화필름, 테잎 등이 백여 상자에 이른다. 모두 1만여 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이들 자료는 추사는 물론 조선후기 청과 조선의
학술과 문화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한편 이들 자료는 후지츠카 아키나오가 2006년 2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과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2006년 2월 1차로 추사 관련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한 후 지난 7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조카 코마다 가즈코가 나머지 자료를 과천시에 기증했다. 이 지면을 빌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후지츠카는 1908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중국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21년 10월부터 1923년 5월까지 1년 반 가량 북경에 머물면서 한학을 연구하였으며, 1926년에는 조선에 새로 설립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교수로 임명되어 중국철학을 담당하였다. 그는 도쿄제국대학시절 은사호시노 호오죠오(星野豊城) 교수와 핫토리 우노기치(服部宇之吉) 교수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 고증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구했다. 그 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청조학을 강의하면서 18~19세기 한.중지식인의 학술 교류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후지츠카는 북경의 고미술품거리 유리창과 서울의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 고서점가 및 골동가게에서 중국 학자와 조선 학자 간에 주고받은 많은 서간문, 탁본, 책 등을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황청경해』의 편찬자 완원과 서화 감식에 뛰어난 옹방강 그리고 조선의 학자 추사 김정희가 특별한 관계로 이어진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달리 말하자면 건륭.가경.도광 연대에 중국의 학풍이 자연스레 조선에 흘러들어오며 경학의 연구, 서화 감정, 금석의 고증 등의 방법이 학문을 전수하듯 조선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또 추사는 금석학이나 예술뿐만 아니라 청대의 학술 특히 경학에 정통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연구 확인하게 되었다. 후지츠카의 이런 연구는 1936년 4월 도쿄대학에서 받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조에 있어서 청조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후지츠카가 이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수집, 연구된 원본 자료(도서는 제외)는 근 1000여 점에 이른다. 이 자료들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한 것들이다. 1940년 그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이 자료를 모두 가지고 갔다. 그 후 그는 일본 대동문화원 교수로 있으면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해방 직전에 손재형이 일본으로 후지츠카를 찾아가서 추사 자료 중 백미인 <세한도>를 가져온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많은 추사 연구 자료는 일대 위기를 맞는다. 당시 그는 자료를 이케부쿠로에 있던 대동문화원 연구실과 네리마에 있던 자택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자료는 연구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자료는 불행하게도 제2차대전 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거의 망실되었다. 그 밖에 집안에 남아 있던 자료가 이번에 기증된 것들이다. 다행히도 연구실에 있던 원본 자료 중 가장 귀중한 자료에 대한 사진이 집에 남아 있어 이번 기증 자료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향후 연구 결과에 따라 귀중한 추사 자료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후지츠카는 수집한 많은 자료 중 그가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한.중 관련 자료만 인용했을 뿐, 나머지 추사 개인과 관련된 자료는 거의 활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번 기증 자료에 대한 세세한 사항이 모두 파악되지는 않았으나, 일차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았거나 문건으로만 발표됐을 뿐 실물로 공개되지 않은 적지 않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향후 이 기증 자료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추사라는 인물과 학문 및 예술세계에 대해 더욱 다양하고 심도 있은 해석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진다.
동양화의 기법 가운데 ‘홍염(烘染)’이라는 것이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릴 때, 가령 달을 그린다고 치자. 그리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달을 노란색이나 빨간색으로 칠하여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 주위를 칠해서 본바탕이 달을 나타내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후자의 방법을 홍염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꼭 집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동안 추사 연구에서 부족했던 부분은 홍염법과 같은 방법을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기증 자료 가운데는 추사의 친필 유물이나 추사의 손때가 묻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추사를 중심으로 하여 추사와 직. 간접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는 제2, 제3의 자료가 핵심을 이룬다. 추사를 연구하려면 추사 본인의 글과 예술작품이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추사와 같이 기본적인 1차 자료가 부족한 인물은 주변 자료가 필수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기증 자료는 추사라는 인물을 홍염법으로 탐구해갈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후지츠카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를 만나보고 후지츠카 집안이 넉넉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월급을 쪼개어 자료를 사 모은 것이다. 그래서 예술성으로 평가되는 작품보다는 사료가 되는 책과 자료가 대부분이다. 또한 직접 살 수 없었거나 후손이나 소장가가 가지고 있는 것일 경우에는 대부분 사진을 찍어서 언젠가 자료로 쓸 때를 위해 보관해 두었다. 이들 사진 자료는 추사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거의가 한국전쟁 이전에 찍어둔 것이라 국내에 있었던 것은 십중팔구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에 기증한 자료 속에 사진으로나마 남아있는 것들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한 번 고마움을표한다.
후지츠카는 자료를 구입하면 몇몇 동호인과 함께 품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기에 진위 여부는 지금 우리 눈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아마도 후지츠카가 당대 최고의 안목과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자료중에『망한려인상』이라는 인보집이 있다. 이 인보집에 있는‘穎雲海旅松隱無號素筌同時審定之印’이라는 인기(印記)가 이를 대변해주지 않나 싶다. 당시 최고의 감식가로 인정받던 영운(穎雲) 김용진(金容鎭), 해려(海旅) 임상종(林尙鍾), 송은(宋隱) 이병직(李秉直),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그 주인공들이다. 후지츠카는 이들과 같이 구입했거나 사진 찍은 자료를 심정(審定)했으며, 이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격려야말로 추사 연구의 큰 힘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