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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유보(幼輔), 호(號)는 정미와(精美窩)이다.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고 김정희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도총관, 제용감제조를
지냈다. 그가 예산 용궁리 용봉산에 세운 경주김씨 원당(願堂) 사찰인 화암사(華巖寺)가 있다.
벼슬은 형조판서, 대사헌을 지냈다. 월성위 김한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이다.
김이주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셋째아들인 김노경이 김정희의 친아버지이다.
자는 가구(可久)이고, 김이주의 장남으로 김노경의 큰형이자 김정희의 양아버지이다. 1763년 진사, 문화현감을 지내다 문과에
급제 후 예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노영에게 후사가 없어 김정희가 큰집으로 출계하였고, 뒤에 김정희는 백부와 조부의
연이은 사망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적선방에 있던 월성위궁의 주인이 되어 가문을 지켰다.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으로 김이주의 아들이며 김정희의 아버지이다. 글씨를 잘 써서 아들 김정희에게 영향을 미쳤다.
승지, 평안도관찰사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 1822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익종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할 때 김로(金), 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휘둘렀다는
죄와, 이조원(李肇源)의 옥을 밝히지 않았다는 죄로 인하여, 1830년 탄핵을 받아 강진현 고금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사후에 이 사건이 다시 불거져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6년 만에 복권되었다.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山泉)으로 김노경의 아들이며 김정희의 동생이다. 경(經), 사(史)에 밝고 글씨를 잘 썼다.
벼슬은 창녕현감, 강동현령,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822년 동지겸 사은정사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의 저자인 유희해(劉喜海) 및 진남숙(陳南淑) 등과 교분을 맺었다.
자는 기재(起哉), 호는 금미(琴)이며 김정희의 막내 동생이다. 영유현령 등을 역임하고, 1851년 과천으로 방축되었다가 1857년에
풀려나 호조별랑을 지냈다. 서예에 뛰어났는데 추사체를 배우고 따라 썼다.
자는 경득(景得), 호는 서농(書農)으로 김정희의 양자(養子)이다. 생부는 김정희의 12촌 김태희(金泰喜)이다.
1858년에 생원이 되어 참봉, 사과 등을 지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된 다음해에 입양되었다.
자는 천신(天申), 호 수산(須山)이다. 김정희의 서자(庶子)로서 음관으로 승문원 이문학관, 사과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