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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6년 6월 30일 : 정혜린 - 추사의 예술을 다시 본다
글쓴이 관리자

6월 30일 : 정혜린 - 추사의 예술을 다시 본다


추사의 예술을 다시 본다 : 서예론에 대한 재검토

발표자: 정혜린(서울대 강사)

목차
1 머리말
2 추사의 비학과 완원阮元의 서예사론
3 추사의 첩학과『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4 시서화 일치를 구현하는 서예의 원칙들
5 맺음말

1 머리말

서구문화의 유입 뒤로 잊혀진 한국의 문화는 삼국의 문화도 고려의 문화도 아닌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의 문화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바로 그 시기 사상계와 예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서, 한국 문화의 정체성에 관해 중요한 맥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의 서예 창작의 위대함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떠난 지 150년이 된 지금까지 그 위대함의 크기는 여전히 수면아래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그 위대함에 관한 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론이 아직도 많은 해석을 기다리는 까닭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그의 서예론의 두 측면을 통해 그의 서예작품을 다시 접근해 본다.
첫째, 그의 서예론은 의식적으로 구축된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희는 시서화일치를 문인들 사이에 보편화된 한갓된 구호가 아니라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내표하는 학문적 체계를 갖추어야 할 명제로 보았다. 그의 시론·서예론·화론에는 동일한 창작의 전제·과정·목표가 주여져 있다.
둘째, 동시에 그의 예술론은 중국 명청대 최신의 예술론들을 검토하여 절충 종합한 이론이라는 점이다. 그의 서예론 역시 완원의 서예론 뿐 아니라 청대 여러 서예론을 수용했으며, 무엇보다 이들 개개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나름의 시각이 존재한다.
이 글은 그의 서예 작품들을 그 체계화된 이론에 입각해 구현된, 서구화이전 중국문화권 최신의 ‘예술’로서 다시 조명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이하에서는 김정희가 청대 비학과 첩학을 어떤 이론에 근거하여 절충했으며 그 절충의 시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본다.

 

2 추사의 비학과 완원阮元의 서예사론

김정희의 서예론의 출발과 목표는 역시 문예론과 화론에서처럼 조선에 정통 서예 이론과 창작을 구현하는 것이다. 『전집』 권4 , 「與張兵使寅植」12, “大抵我國之壬辰 不知是何等百六大運 而上自朝家典章 至於閭巷風俗無不大變. 至今未復舊 文章書畵之小道 亦皆從以遷謝 竟未有挽回 如明宣以上渢渢大雅之風 不可得見 常所嘆惜.”
그가 본 조선 서예의 문제는 심각했다. 조윤형이나 유한지의 경우처럼 학문과 같은 전제조건을 갖추지 않는가 하면, 윤순 혹은 강세황처럼 검증된 서예학습자료와 서예사에 대한 통사적 인식의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학습의 분위기를 배운 윤순의 제자 이광사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 역시 글씨의 품격 이전에 학습 자료의 올바른 선택과 창작론의 올바른 학습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전집』권 6, 「書圓嶠筆訣後」, “其天品超異 有其才而無其學 無其學又非其過也. 不得見古今書法善本 又不得取正大方之家 但以天品之超異 騁其貢高之傲見 不知裁量.”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그는 올바른 서예 창작에 필수적이라고 본 몇 가지 요소들을 조선에 제시한다. 선별된 작가로 구성된 정통 서예사, 이 역사를 통해 구현된 창작 기법들과 이 법칙들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작가의 정신, 노력의 축적을 통한 깨달음이 그것이다.
정통 서예론에 관해 김정희가 논거로 삼은 자료는 크게 금석학과 첩학의 맥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금석학에 관해 일반적으로 김정희는 조선후기 금석학의 열풍을 체계화하여 학술적 미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으로 평가된다. 그가 조선의 금석학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완원(阮元, 1764-1849)의 금석학 연구 업적에 크게 의지하였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김정희의 서예론은 완원의 금석학과 무관한 많은 서예 창작 이론들을 수용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금석문을 바탕으로 한 대가인 등석여鄧石如와 이병수伊秉綬 외 옹방강, 유용劉墉, 진혁희陳奕禧, 왕주王澍, 성친왕成親王, 장득천張得天 등 완원의 금석학 업적에 의지하지 않는 청대 대가들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일까. 김정희와 완원 양자 사이의 중요 차이점은 우선 서예사 부분에서 완원이 육조시대 남첩과 북비의 서체를 대립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북비의 서체를 선호한데 비해, 김정희는 양자의 절충을 꾀하였다는 점이다. 朴東圭,『阮堂金正喜 書法藝術硏究』, 南京藝術學院學位論文, 2002.

완원의 이론적 성과는 이미 청대 열풍을 일으켰던 한대 금석체가 육조시기 비문으로 계승되었다고 밝힌데 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물론 한대 내에서도 서체의 변화는 있었다. 전한 예서는 파책波磔이 없었으나 <예기비禮器碑>, <공화비孔和碑>, <사신비史晨碑> 등을 통해 볼 때 후한 이후 파波, 책磔, 별撇이 가해진 보다 장식성이 가미된 서체가 등장했다. 이 때 완원은 여운 혹은 절제미(留有餘不盡之意)를 기준으로 파책이 없는 전한의 서체를 더 격이 높다고 평가한다. 물론 후대의 글씨에 비한다면 한대 예서의 특징은 고졸古拙함과 흐르지 않는 굳음(方勁)에 있다. 요컨대 그는 한대 예서에 대한 평가에서 장식이 없는 힘(雄奇之力)을 중시했다.
이후 육조시기 북비들이 한비의 서체의 기풍을 보존했고, 이 특징들이 당대唐代 초기 구양순歐陽詢과 저수량褚遂良까지 전해졌다. 완원은 이를 북파라고 불렀다. 북파의 서체의 특징은 거침없이 격을 벗어나고(疏放) 곱고 매끈한(姸妙) 남파의 아름다움과 대조된다. 북파의 중요 작가로는 종요鐘繇, 위관衛瓘이후 삭정索靖, 요원표姚元標, 조문심趙文深, 정도호鄭道護, 당대의 구양순九陽詢, 저수량褚遂良 등이, 남파의 대가로는 종요와 위관을 거쳐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왕승건王僧虔과 이후 남조의 지영智永과 당의 우세남虞世男이 꼽힌다. 이후 남첩의 서체는 당대 정관貞觀 연간에 이르러 성행하기 시작한 반면 금석체는 청대까지 주목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상은 한에서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초에 이르는 완원의 서예사론이자 이에 근거한 김정희의 서예사관이다. 『揅經室三集』권 1,「南北書派論」과 「北碑南帖論」참조.

그런데 완원은 단순히 북비의 계통을 밝히는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북파의 서체의 중흥을 요구했다. 그는 ‘송의 『순화각첩』이 성행하여 중원의 비판을 홀시하자 이에 점차 북파가 미미해져 갔다. 원·명의 많은 서예가들은 『순화각첩』의 울타리 안에 갇혔고 또「난정계서」와 같은 것 외에는 서법이 없다고 여겼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은가. 총명한 선비들이 시속을 떨쳐 일어나 전심하여 북파를 연구하여 구양순과 저수량의 옛 규범을 지키고 (북조) 위·제의 스러진 업적을 찾으면 한위의 옛 법은 세속의 글씨에 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서예관을 밝혔다.『揅經室三集』권1, 「南北書派論」, 557면,
그는 보다 절제되어 있으며 반듯하고 힘찬 예스러움을 간직한 서체를 선호하고 그 부활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청대 처음 북비가 재발견되자 그 힘은 상당히 두드러진 개성(奇雋·瑰特)으로 부각되었다. 청대 서예계에서는 한비 그리고 위비에 근거한 서체가 순서대로 풍미했다. 한비의 서체를 구현한 대표적 작가로는 건가 년간 이래 계복桂馥, 등석여, 이병수 등이 꼽히며 위비의 서체를 구현한 작가로는 함동咸同년간 이후 장유검張裕劍, 조지겸趙之謙, 양수경楊守敬, 강유위康有爲, 이단청李端淸 등이 꼽힌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왕희지체는 서예창작의 이상으로 거의 추앙되지 않았다. 금석학 연구에 의해 「난정계첩蘭亭禊帖」,「황정경黃庭經」,「악의론樂毅論」,「유교경遺敎經」등 그의 서첩의 원본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김정희 역시 예서가 서예의 근본인데 예서의 특징은 북비가 보존하고 있으므로 한대 이후 북비를 공부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한다.『전집』권 7, 「雜著·書示佑兒」
그러나 그는 북비를 존중한다고 왕희지의 서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현존 왕희지첩 대부분에는 거의 진작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극소수 남아 있는 진작으로부터 왕희지체에 북비 서체의 미가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본 논문의 조사에 따르면 완원은 왕희지의 글씨의 진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완원, 위 책, 「王右軍蘭亭詩序帖二跋」“要之右軍書之存於今者 皆展轉鈎摹”) 그런데 김정희는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快雪帖」과 「蘭亭帖」의 글씨를 논한다.(ꡔ전집ꡕ 권5,「代權彛齋敦仁與汪孟慈喜孫」; 『전집』권7, 「書贈尹生賢夫」.; 『전집』권8, 「雜識」, 245면 참조.)
그는 또한 북비를 알아야 왕희지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누누이 언급하는 등 왕희지체를 높이 평가하는 조선후기 전통 위에 서 있다.
물론 북파와 동시에 이와 대조적인 남파의 근원인 왕희지체를 동시에 긍정한다는 것은 그의 논리에서 보자면 모순은 아니다. 김정희에 의하면 왕희지체는 곱고 매끈하며 농담과 비수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구사하는 필묵법을 갖춘 남파의 특징을 가지며 아울러 전예篆隸의 기미와 북비와 통하는 웅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ꡔ전집ꡕ 권5,「代權彛齋敦仁與汪孟慈喜孫」, “書法之分爲南北兩派 亦不可誣也. 此是南北之各尊一師 互相門戶而已 若叩之鍾王 便各一笑者也. 唐太宗是南派 遂以右軍爲宗. 北派雖不振 然歐褚之自北派來者 源流甚明. 虞則南派 與唐宗相同矣. 歐褚之浸淫於右軍之法門 則與孔穎達之於經學 未盡南學而爲時勢所屈也. 至以右軍爲篆隸遺 則大不可 禊帖之永字趣字 有篆勢隸勢之確證者耳.” (원문은 藤塚鄰, 『추사 김정희 또다른 얼굴』(아카데미하우스), 1994, 444쪽에서 인용)
이후 왕희지체의 특징은 구양순과 저수량 특히 구양순에 의해 계승되었다. 왕희지체의 양면적 특징은 첩학사를 지탱해 온 불변의 원리들 중 하나로 엄격히 준수돼야 한다. 『전집』권8,「雜識」149면, “右軍書亦如此. 或有隱鋒書者 不露其節角 似若泯然一色 無肥瘦大小之分 細觀之 亦皆有差等. 此書家之斲觚爲圓 一轉變者….今之書者 不知此之源流 動輒以爲書無大小畫 遂漫滅其陰陽向背麤細肥瘦. 自古一定不敢易之體式 作一算子 惑矣.”
이렇게 김정희의 서예론는 비학에 관해 완원의 서예사론의 도움을 받았지만 완원의 이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존재한다. 바로 첩학의 원리들이다. 이 부분에서 김정희는 또 어떤 업적들을 주목했을까.


3 추사의 첩학과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김정희는 왕희지 이후 서예사에서 중요 창작 원리로 논해진 많은 첩학의 기법들을 논한다. 이 논의들은 『전집』권8의 「잡지雜識」138-149면과 그 외 ꡔ전집ꡕ에 흩어진 글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의 많은 부분은 강희康熙 47년(1708)에 간행된『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논서論書」권3, 권4, 권7권으로부터 발췌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는 이광사의 서예론을 비판하면서 ‘이미 만호제력이라는 한 마디를 택했으면서 왜 또 그 위 구절의 장심색농漿深色濃을 뽑아 들지 않았는가.’라고 비꼰 바가 있는데 『전집』권6, 「題歐書化度寺碑帖後」.
『패문재서화보』권3, 「書訣」에 수록된 왕승건王僧虔,「필의찬筆意赞」중 ‘剡紙易墨 心圎管直 漿深色濃 萬豪齊力’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하에서 김정희의 서예론과『패문재서화보』의 원문을 비교해 본다. 「雜識」중 서예론은 완원의 남북서파론 개괄, 붓의 종류에 대한 논의, 서법, 서예가(난곡, 백양산인, 옹방강)와 육조 비문, 신라 이래 당시까지 서예가에 대한 비평등이 섞여 있으나 이 글은 창작 기법에 대한 부분들을 추렸다.


① 139면 17행-18행 “결구가 원만해야하니 전법과 같은 것이요 표양하고 쇄락해야하니 장초와 같은 것이며. 흉험하여 두려워 할만하게 해야하니 팔분과 같은 것이며, 요조하게 출입해야하니 비백과 같은 것이고, 꼿꼿이 우뚝 서게 해야하니 학두와 같은 것이고, 울장종횡하게 해야하니 고예와 같은 것이다”
;『패문재서화보』권 3, 「晉衞夫人筆陣圖」, “結構圓備如篆法 飄颺灑落如章草 凶險可畏如八分 窈窕出入如飛白 耿介特立如鶴頭 鬱拔縱横如古隸”
② 139면 18-24행 “점을 만들 때는 반드시 붓을 거두는 데 있어 긴하고 중함을 귀중히 여기며, 획을 만들 때는 반드시 늑으로 하는데 껄끄러우면서 더딘 것을 귀하게 여긴다. 측은 그 붓을 평평히 해서는 안 된다. 늑은 그 붓을 뉘어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필봉이 먼저 가야 한다. 노는 곧은 것만이 좋지 않으니 곧으면 힘을 상실한다. 적은 그 필봉을 보존하여 세를 얻어 출봉해야 하며 (봉을 끌고 내려와 세를 잡아 가슴을 내밀고 선다. 이 양괄호 부분은 『패문재서화보』권4, 「書法三昧· 三 用筆」의 竪畫에 대한 설명인 “引鋒下行勢須作凸胸而立”이 삽입된 것으로 보임.
) 책은 앙필로 나아가 거두어야 한다. 략은 필봉이 왼쪽으로 나가되 예리해야 한다. 탁은 붓을 눕혀 빨리 나아가 덮어야 한다. 책은 전필로서 출발하여 뜻을 얻어 서서히 출봉해야한다. 무릇 점은 준각을 요하여 원평을 꺼리고 통변을 귀히 여긴다. 책해야할 곳에서는 책으로 하니 年자가 그것이며, 늑을 써야 할 곳에서는 늑으로 해야하니 士자가 그것이다. 무릇 횡획은 모두 위는 앙획 아래는 부획으로 하니 士자가 그것이다. 세 횡획이 어울리면 위는 평획, 중은 앙획, 아래는 부획으로 하니 春, 主자가 그것이다. 무릇 세 획을 다 사용해야 한다.
『패문재서화보』권 3, 「唐太宗筆法訣」, “為㸃必收貴緊而重 為畫必勒貴澀而遲…….側不得平其筆 勒不得臥其筆須筆鋒先行. 努不宜直 直則失力. 趯須存其筆鋒 得勢而出 策須仰䇿而收 掠須筆鋒左出而利 啄須臥筆而疾罨. 磔須戰筆發外得意徐乃出之. 夫㸃要作稜角 忌於員平 貴於通變.. 合策處策年字是也. 合勒處勒士字是也. 凡横畫並仰上覆收士字是也. 三須(觧磔『패문재서화보』원문 중 양괄호는 『전집』에 없는 부분임.
)上平中仰下覆 春主字是也. 凡三畫悉用之…….(書苑菁華)”
③ 139면 24행 “측은 그 붓을 기울여 내려가고 먹은 정제되어야 한다.”
『패문재서화보』권 3, 「永字八法詳説· 側勢第一」, “(蘭亭考 卷四 宋桑世昌 李陽冰筆訣曰)側者側下其筆使墨精 勒不可臥其筆.
④140면 1행 “늑은 붓을 뉘어서는 안 되고 가운데는 높고 두 머리는 낮은 데 필심으로써 누른다.”
『패문재서화보』권 3,「永字八法詳説· 勒勢第二」, “勒不得臥其筆中髙兩頭下以筆心壓之.”
⑤ 140면 2행-4행 “단획의 祖는 一이니 策법을 쓴다. 앙필역봉으로 가벼이 들고 나아가서 마치 편책의 세와 같이 한다. 두 머리는 높고 가운데는 낮다. 유종원은 이르기를 “책은 앙필로 거두어 살짝 쳐든다.”고 했다. 其·天·夫·才와 같은 종류이다. 무릇 단획은 다 책이 된다.”
『패문재서화보』권 4, 「書法三昧·運用」 이 글은 ꡔ패문재서화보ꡕ에 의하면 원대 처음 출현했고 鄱陽 주변에서 전승된 글이라고 함
, “短畫之祖一 策法也. 其法仰筆䟐鋒 輕擡而進 有如鞭策之勢. (故言策不言勒 異於勒者 勒則兩頭下中髙 策則)兩頭髙中下. (唐太宗云 策者仰策仰收) 柳云策仰收而暗揭. 如其天夫才之類. 凡短畫 皆為策(也).”
⑥ 140면 4행 “파의 파임과 종의 파임은 오정으로 首一 中三 尾一이며, 횡의 파임의 오정은 首一 中二 尾二이다. 대체로 앙획을 만들 때는 준을 하지 않고 봉으로써 겉으로 싸며, 준은 삼면에 힘이 충만히 가서 순지로 비스듬히 내려가 힘이 가득 차면 살짝 머물러 쳐들면서 삼과해 출봉한다. 필획 중 또 삼과가 있어 수파가 기복하는 것과 같다.” 이글 바로 아래 戰과 蹲, 역, 석, 抑, 수의 음운학적 풀이와 뜻풀이(140면 6-9행)는 찾지 못함. 김정희 자신의 해석이라고 추측됨.

『패문재서화보』권 4, 「元陳繹曽翰林要訣·第八員法」, “波乀從乀五停 首一中三尾一 横乀五停 首(一)中二尾二. 大體作仰畫不蹲 以鋒傍裏褁(空) 蹲三面力到 順指欹下 力滿微駐 仰出三過 筆中又有三過 如水波之起伏也”
⑦ 140면 9-12행 “무릇 서를 공부하는 문은 열두 종의 은필법이 있으니 바로 지필, 질필, 역필, 순필, 도필, 삽필, 전필, 와필, 제필, 탁필, 엄필, 역필이다. 용필에서 생사의 법은 유은에 있고 지필의 법은 질에 있고 질필의 법은 지에 있다. 역입도출하여 세를 취해 다스리고, 때를 살펴 조정한다. 그 묘리를 얻기까지는 모름지기 공력이 깊어야 하며 쉽게 그윽함을 얻으려 들면 얻기 힘들 것이다.” 이하 140면 13행-16행은 『패문재서화보』에서 확인하지 못했음. 김정희의 글이라고 추측됨.

『패문재서화보』권 3, 「唐張懐瓘用筆十法」, “(翰林密論云)凡攻書之門 有十二種隐筆法. 即是遲筆疾筆逆筆順筆澀筆倒筆轉筆渦筆提筆啄筆罨筆䟐筆. 並用筆 生死之法 在於幽隱 遲筆法在於疾 疾筆法在於遲 逆入倒出 取勢加(攻)診候調停. (偏宜寂静)其於得妙 須在功深 草草求(玄)終難得也. (王氏法書苑)”
⑧ 140면 17-18행 “서가가 비록 장봉을 귀하게 여기나 모호한 것으로써 장봉이라 할 수는 없으며 모름지기 붓쓰기를 태아검이 자르고 베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대개 경리로써 세를 취하고 허화로써 운을 취하며 진흙에 도장을 찍고 모래에 송곳으로 획을 긋듯이 해야만 되는 것이다.”
『패문재서화보』권 7,「明董其昌論書」, “書家(以豪逸有氣能自結撰為極則 書法)雖貴藏鋒 (然)不得以糢糊為藏鋒 須有用筆如太阿剸截之意. 盖以勁利取勢 以虚和取韻 (顔魯公所謂)如印印泥如錐畫沙是也耳.”
⑨ 140면 21행 “서가에 이르기를 ‘진서를 쓰면서 능히 전주의 법을 붙여 나가면 고금에 높다’고 했다.”
패문재서화보, 7, 「明吳寛論書」, “書家謂作真字 能寓篆籀法 則髙古今.”

이상의 발췌문들은 용필(①, ⑦, ⑧), 묵법(③),점법(②), 획법(②,③,④,⑤,⑥)과 결구법(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진위부인필진도晉衞夫人筆陣圖」,「당태종필법결唐太宗筆法訣」, 영자팔법永字八法, 서법삼매書法三昧,「원진역증한림요결元陳繹曽翰林要訣」,「당장회관용필십법唐張懐瓘用筆十法」,『왕씨법서원王氏法書苑』,「명동기창논서明董其昌論書」,「명오관논서明吳寛論書」 등 위부인, 왕희지 이래 당 태종에서 명대 동기창까지 첩서의 기법서들이다. 김정희는 이상의 구절들을 그대로 발췌해 놓을 만큼 첩서의 기법들을 용필법과 점법으로부터 획법, 결구법에 이르기까지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은 그의 서간문 등 다른 글들에 등장하는, 그가 주장하는 기법들과 관련된다. 위의 발췌문을 제외한 다른 서예에 관한 논의들은 크게 집필법과 운필법, 점법과 획법, 자법을 포함한 결구법으로 나눌 수 있다. 김정희는 오지제력五指齊力, 현완현비懸腕懸와 같이 금석기를 드러낼 수 있어 청대 비학파들에게 애호된 집필법과 운필법을 중시했다. 예컨대 이광사가 주장하는 신호伸毫와 달리 강한 힘을 구현할 수 있는 중봉中鋒을 중시했고, 위 발췌문 중 ⑧의 장봉 역시 강한 힘과 예리함을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는 역세逆勢를 취하여 깊고 강한 힘을 내기 위한 발등법撥鐙法도 서예의 기본이 된다고 중시했다. 그러나 이 강한 힘은 때에 따라 변화있게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김정희는 발등법을 중시하면서도 시세에 따라 운용해야한다고 하면서 ⑦에서 본 지필, 질필, 역필, 순필, 도필, 삽필, 전필, 와필, 제필, 탁필, 엄필, 역필의 12 은필법으로써 발등법을 제한했다. 그는 종요와 삭정 이하의 구전되던 비결이 지영의 영자팔법으로 드러나고 이후 12 은술법과 70여 법칙으로 구체화된 법의 역사를 주시했다. 『전집』권8,「雜識」, 149면. 여기서 말하는 칠십여칙이란 『패문재서화보』권4의 七十二例法 즉 72필법(작자 미상)이라고 짐작됨.

또한 그는 획법에서 법은 언어로 전달하기 힘든 신神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고, 획의 음획과 양획에 대해 음과 획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도 음이 있어 그 변화가 무수하므로 다양한 변화에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정희가 획법과 그 법의 자유로운 운용을 모두 중시하고 이론화시키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집필, 운필, 획법 등에 대한 김정희의 언급으로부터 그가 비학과 첩학을 절충하려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자에서 그는 강하고 일관된 힘을 구현할 수 있는 집필법과 운필법을 주목했다. 반면 후자에서 주목한 것은 점, 획, 자, 장법에 일관하며 ‘때에 따른 변화’ 내지 ‘정제 중의 변화’를 구현할 기법들이다. 그가 첩학에서 특히 결구법을 중시한다는 점은 위의 인용문들 외에서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학파들은 금석문의 균일한 글자의 배치를 따르며 다양 속의 정제라는 첩서의 결구법을 소홀히 한다. 반면 김정희는 ①에서 무궁한 변화를 함축한 결구를 중시한다. 그는 이광사가 결구법을 도외시했음을 비판하면서 ‘우가 짧으면 아래를 가지런히 하고 좌가 짧으면 우를 가지런히 한다.’는 자법과 구궁간가九宮間架의 팔십여 격 등이 종요와 삭정 이래의 불변의 법임을 강력히 주장했다.『전집』권6, 「題圓嶠筆訣後」.; 『전집』권 6, 「題歐書化度寺碑帖後」.; 『전집』권 8,「雜識」, 146면, “右短下齊 左短上齊 間架結構八十餘格.”
이 자법과 장법의 결구법은 각각 『패문재서화보』권4 「서법삼매書法三昧·二 포치布置」중 “喉嚨呼吸字左短 口欲上齊. 和扣如知字 右短口欲下齊.”과 같은 권「명明 이순李淳 대자결구大字結構 팔십사법八十四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북비의 강하고 반듯한 힘과 남첩의 정제 중 다양한 변화를 모두 구현할 수 있는 집필법과 운필법, 점법, 획법, 장법을 종합하려 했다. 그는 이러한 불변의 법을 갖추지 않는 한 서예는 하나의 기예가 될 뿐이라는 단호한 입장에 있다.윗 책 권8,「雜識」, 147면, “書有懸腕撥鐙布白等法 俯仰向背上下照應諸妙 点畫淸楚 章法具備乃可. 且鍾索以來 有不能易之一式 左右字是已. 右短下齊 左短上齊 間架結構 八十餘格 不從此入 妄拈一畫 盲施一波 如近日俗匠顚倒猖狂 俱是惡札耳.”

김정희는 완원의 서예사론과 ꡔ패문재서화보ꡕ를 토대로 금석체의 미와 남첩의 서체의 미의 조화를 서예사의 중요 법칙으로 간주한다. 이 학문적 실증적 뒷받침을 통해 그는 서예론에서도 시론과 화론이 공유하는 ‘예술을 구성하는 명제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아래에서 보듯이 이 명제들이 청대까지의 중국 역대 서예작품들에서 존재해 왔다고 다시 말해 문예론과 화론에서처럼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으나 정통 서예의 계보를 따라 전해 왔다고 본다.


4 시서화 일치를 구현하는 서예의 원칙들

김정희는 이상과 같은 청대 비학과 첩학의 연구성과를 절충하여 서예가 시, 문, 회화와 동일한 단계를 밟아 예술로서 성숙하기를 요구했다.
첫째, 창작의 전제조건으로서 인격 수양과 학문에의 요구이다. 그는 특히 예서에 대해 “가슴속에 맑고 높고 예스러운 의意”와 “문자향과 서권기”를 요구했다. 김정희는 문예와 그림을 일관하여 서예에서도 이들 조건을 필수로 내세워 완원에게서 보이지 않던 문인 정신을 강조했다.
둘째, 문예론과 화론에서 그런 것처럼 그는 법만큼 그 너머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의 세계를 중시했다. 이 세계는 “고인들이 마음으로 전하고 받은” 세계이다. 이 영역은 언어와 형상 등의 흔적을 갖는 관습(蹊逕)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작가 주체가 자득하는 영역(所自致)이다. 그는 심희순과 조면호에게 작가의 기질에 따라 모범으로 삼아야할 대가가 다를 수 있다고 개성에 근거한 학습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 영역은 개인의 의지(齷齪), 인위(人力)를 벗어나 천기, 신, 정신, 흥회, 의지의 우연한 발생(偶然欲書) 등을 통해 드러난다. 김정희는 글씨에 흥회 내지 우연적 의지가 없으면 문인 예술의 소산이 아니며 감상할 수 없는 기술자(字匠)의 글씨가 되어 버린다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정희는 분명 이처럼 주관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긍정했다.
셋째 그는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과 이를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얻어야 한다는 점을 문예론과 화론을 이어 여전히 강조한다. 그는 심희순의 글씨가 비범한 재능 뿐 아니라 제필制筆 노력(人工)을 통해 점점 구중彀中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집』 권4, 「與沈桐庵熙淳」28, “第其点拂 漸入彀中 古人所謂子敬泥暈最驗天骨 兼以制筆 復識人工者 可以當之 每見其虛淡一格 非家火凡汞所襲而取之也.”
그랬을 때 힘(力)과 신神이 동시에 구비되고 최고의 경지(堂奧)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윗 책 권 4, 「與沈桐庵熙淳」27, “以水流花開之機妙 運以居楔土石 自地築起之功 神髓眞力 不難門徑堂奧之漸次梯進.”


서법과 시품과 화법은 오묘한 경지가 동일하다. 전한 고예의 못을 끊고 철을 자를 듯한 가공할 만한 험준함이란 ‘건健을 쌓아 웅雄이 된다.’의 의미(『이십사시품』‘雄渾’條)이며, 청춘 앵무는 (같은 책, ‘精神’條) 꽃을 꽂은 무녀가 거울을 당겨 봄을 즐겨 웃는 의미이며, 천지를 유희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삼진三辰을 부르고 뒤로는 봉황을 이끈다.’의 의미(같은 책, ‘豪放’條)이니 시와 통하지 않음이 없고 또 ‘형상 밖으로 나아가 환중還中을 얻었다’는 말밖에 있지 않다. 『이십사시품』에 대해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글씨의 경지가 시의 경지일 뿐이다. 예컨대 영양이 뿔을 걸어 찾을 자취가 없음에 이르면 작가 자신에게서 신神의 깨달음이 생겨 신이 인도하여 또한 찾을 자취가 없는 것이다.윗 책권 8, 「雜識」, 140-141면, “書法與詩品畵髓 同一妙境. 如西京古隸之斬釘裁鐵 凶險可畏 卽績健爲雄之義. 靑春鸚鵡揷花舞女 援鏡笑春之義. 遊天戱海 卽前招三辰後引鳳凰之義. 無不與詩通 幷不外於超以象外 得其還中一語. 有能妙悟於二十四品 書境則詩境耳. 至若羚羊挂角 無迹可尋 自有神解在 神以明之 又非蹤迹可覓耳.”


위 글에서 대구를 이루는 세 구절들은 『패문재서화보』중 서예의 품격을 논하는 세 구와 『이십사시품』중 시의 품격을 논하는 세구로 구성돼 있다. 전자의 세 구는 『패문재서화보』권4, 「원오연삼십오거元吾衍三十五舉」와 같은 책 권8, 「양무제고금서인오열평梁武帝古今書人優劣評」으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오연삼십오거」는 한대 예서체에 대해 방경 고졸하여 못의 머리를 끊고 철을 잘라낸듯함을 구비하여 그 예법이 자못 깊고 예법의 대략을 갖추었다고 평했다. “十九舉曰……漢隸書體 括云方勁古拙斬釘截鐵備矣 隸法頗深具其大略.”
후자인 「양무제고금서인우열평」은 양무제의 칙령으로 원앙이 저술한 『고금서평古今書評』을 싣고 있는데 『고금서평』은 종요鍾繇의 글씨를 ‘구름 위 고니가 하늘에서 노니는 듯, 뭇 기러기가 바다에서 유희하는 듯하나 행간이 긴밀하여 실로 (행간을)지나가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위항衞恒의 글씨는 ‘꽃을 꽃은 미녀가 경대를 마주하고 웃으며 춤추는 것과 같다’고 평하였다. “鍾繇書 如雲鵠游天羣鴻戲海 行間茂密實亦難過…….衞恒書如 插花美女 舞笑鏡臺.”
김정희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시와 서 모두 엄중함, 아리따움 등의 다양한 개성이 있는데, 이는 신이 활동하여 형상 밖(還中) 즉, 언표 밖의 경지의 획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는 청대 장득천이 동기창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 미치는 결정적인 이유로 인위적 노력과 자연의 심연을 언급하는데 장득천은 아직 인위적 노력의 경지요 신성神聖·천인天人의 경지가 아니라고 한다. 바로 난 그림에 관해 이하응에게 언급했던 9999와 1의 간격을 지시한다. 김정희에 있어서 깨달음 이후에 얻는 만물에 대해 자유로운 정신의 경지는 학문의 축적, 세속을 떠나 고양된 인격을 통해 촉진되며 예술 장르상 시·서·화의 표현 매체의 구체성·한정성을 벗어나 각 장르에서 통용될 수 있는 공통의 정신적 경지를 보장해 준다.
김정희는 완원과 달리 이상과 같은 예술로서의 조건이 서예의 필수 조건이라고 힘주어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내심 이 조건들을 갖는 서예가의 정통 계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서·이광사 등 김정희 이전 왕희지체를 숭상하는 많은 서예가들은 서예의 모범을 이왕 혹은 당초 구양순과 저수량만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김정희는 청대까지 모범적인 서예가의 계보를 둠으로써 이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왕과 종요 등은 원본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 이 계보는 서예 학습의 모범은 앞서 본대로 한·위대의 북비에서 왕희지, 당초의 구양순과 저수량으로 이어진다. 양자 이후 팔자결八字訣이라는 서예의 최고 비결을 제시한 지영선사가 왕희지의 서체를 계승했으며윗 책 권 8 ,「雜識」, 149면.
안진경은 저수량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거론되나 저수량을 변형시켰고 그 변형의 원리는 왕희지체라고 한다.윗 책 권 8. 「雜識」143면.
송 대 미불이 저수량의 정통을 이었으며, 원대 왕몽 역시 구양순·저수량을 거쳐 왕헌지의 정신을 이해한 인물이다. 이 정통성은 명대로 이어진다. 동기창은 구양순 이후 김정희에 의해 서예사의 한 결절을 이루어 냈다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김정희가 그랬듯이 동기창은 여러 역대 작품들을 종합하여 창신으로 나아갔다. 동기창은 저수량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역시 저수량을 배운 안진경의 글씨에 더 가까울 정도로 창아험경蒼雅險勁의 풍격이 있다. 이와 관련해 동기창의 서체는 일반적으로 곱고 유려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김정희는 필획마다 중봉을 사용하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왕희지의 특장을 계승했다고 본다. 또한 그 경지를 인공의 경지를 넘어 신성의 경지에 들어간 최고로 평가된다. 청대에서 김정희는 유용을 동기창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했다. 유용은 소식으로부터 학습을 시작했으나 역시 동기창처럼 강하고 웅장한 힘을 지닌 채 왕희지의 장점을 이었으며, 재능이나 결과된 경지에 있어서나 역시 지적 감각적 인식으로서 파악하기 힘든 신神의 경지에 있다. 김정희가 청대 초 첩학의 사대가 중 한 사람인 유용의 글씨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은 姜澄淸 저, 『中國書法思想史』, 河南美術出版社, 1992, 11장 참조.
완원과 그의 두드러진 차이점이 된다. 완원은 유용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고 유용의 청으로 유씨 족보의 서를 써 주기도 했지만,『揅經室三集』권 1,「諸城劉氏族譜序」.
그의 글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바 없다. 김정희는 그 외 청대 서예가 중 옹방강과 장득천, 성친왕을 높이 평가했다. 김정희는 이들을 각각 구양순과 저수량, 동기창, 구양순의 정맥을 이은 인물로 언급했다.


5 맺음말

이상 비학과 첩학의 절충, 예술로서 창작의 전제 조건, 노력, 법과 그 너머의 영역의 조화, 최종적인 깨들음 이 요소들의 체계가 조선의 서예계에 구현되는 것 이것은 김정희의 서예론의 목표지점이다. 그는 심희순·조면호·권돈인 등 재능 있는 서예가들을 구체적인 학습법을 가지고 인도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이들에게 서체마다의 모범적인 역대 작품들, 그리고 학습의 단계에 따른 이론서들을 구별해 설정해 주기도 했다. 그는 사회 문화 전체에 대해 책임의식을 지니는 유가자 문인의 전통을 따라 책임의식을 가지고 당시 서예계를 교정하고자 했다. 그는 정통을 수립하는데는 여러 명청대의 최신의 학술업적을 근거로 삼고 중국 서예사의 정통 계보를 염두에 두었고 이에 대해 서예론의 인식론적 축을 보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근대적 문화지형으로 이끌어 올리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그가 서예가 기술이 아닌 예술로서 학문적이고 단계적인 체계(格物致知)를 갖추어, 유가의 예술이념인 대아大雅를 실현하기를 요구했다는 점 역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김정희는 유가 사대부 문화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유가 혹은 보다 넓게 학문과 인격 수련을 토대로 하지 않는 창작 경향을 감각적이고 통속적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여기서 근대성과 아울러 전근대성의 복합성이 보이며 이는 19세기라는 시대와 관련해 주목해 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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